크레타, 제우스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땅이자 유럽 최초의 고등 문명인 미노아 문명이 태어난 땅.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다. 제주도의 4배 반 정도로 남북으로 좁고 동서로 길다. 긴 동서로 광대한 산맥이 뻗어 남북을 분리하는데, 주요 도시는 북쪽 해안에 있고 남쪽 해안은 너무 험준해서 사람이 거주하기 어렵다.
크레타의 중심 도시는 이라클리오다. 아테네에서 배로 9시간, 비행기로는 1시간30분가량 걸린다. 여행자들은 보통 이라클리오와 하냐에서 머문다. 마리우는 이라클리오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거리다. 남쪽 해안의 플라키아스에서 가까운 작은 동네로 마리우에 여행자가 머무는 일은 드물고 보통 플라키아스에 머문다. 장기 여행자와 외국인 거주자가 굉장히 많다.
◆크레타의 역사는 이라클리오 거리에 새겨져 있다
이라클리오의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고대의 크레타 사람들이 얼마나 쾌활하고 역동적이었는지, 나라는 얼마나 부유하고 막강했는지, 예술은 얼마나 우아하고 세련되고 매력적인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 미노스 문명이 쓰러진 이후 크레타는 도리아인, 로마인,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The Archaeological Museum of Heraklion
4백여년 간 크레타를 지배한 베네치아인들은 오스만제국의 침략에 대비해 이라클리오를 거대한 요새로 만들었다. 이라클리오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구항구 방파제 끝에 솟아있는 성채가 요새의 요체다.
베네치안 성채에서 해변 도로를 사이에 두고 8월25일 거리가 이어진다. 바다에서부터 완만하게 올라가는 이 길은 크레타 금융의 중심지이자 피의 길이다. 길은 1898년 8월25일 터키의 크레타 주민 대량학살을 기억한다. 길의 끄트머리에 엘 그레코 공원이 자그마하게 들어서 있고 도시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베니젤루 광장이 열려 있다. 광장의 오른쪽에는 힌다코스 거리가, 왼쪽에는 보행자 전용 도로인 다달루 거리가 모두 식당과 카페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광장에서 계속 직진하면 1821거리다. 1821년은 그리스가 독립을 선포한 해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베네치안 성벽의 남쪽 벽에 닿는다. 성채에서부터 남쪽 성벽까지, 미로 같은 골목을 만들며 이어지는 이 길에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크레타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베네치안 성벽의 남쪽 벽의 중앙에 아름다운 묘가 하나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잠들어 있다. 묘지에 오르면 이라클리오의 하얀 집들과 푸른 에게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크레타는 1830년 그리스 영토로 귀속되었지만 곧 이집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다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는 등 침략과 지배와 반란과 저항이 반복되는 피의 19세기였다. 크레타가 완전히 그리스의 영토가 된 것은 1913년이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오스만 치하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나 격동의 청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세계대전과 내전 등을 겪으면서 그는 인간의 자유와, 죽음과, 신과 영혼, 그리고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에 몰두했다. 오후 6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다와 하늘과 크레타는 너무나 평화롭다. 나무 십자가의 그림자가 묘석위에 드리워지고 묘비가 태양빛에 반짝인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